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턴 1세 (문단 편집) == 인기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1.bp.blogspot.com/bicycle.jpg|width=100%]]}}}|| 이런 그의 모습은 샌프란시스코 시민들에게 귀감이 되었고 [[샌프란시스코]] 시민들 사이에서의 인기도 매우 높았다. 한 예로 노턴은 본인이 샌프란시스코의 모든 교통수단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으나, 센트럴 퍼시픽 열차회사에서 그의 [[무임승차]]를 거부하자 이 자칭 황제는 해당 열차 회사에 영업 정지 '칙명'을 내렸다. 그리고 시민들이 열차회사에 크게 항의하여, 센트럴 퍼시픽 열차회사에서는 사죄하며 종신 무료 탑승권을 제공하였다. 또 본인 제복이 낡자 신문 기사에 내려 자신의 예복이 국가적인 수치라는 글을 썼으며 이에 시 위원회에서는 '황제께서 낡은 옷을 입고 돌아다니시는 광경을 볼 수 없다'며 '황실 예복비용'을 마련해 그에게 최고급 맞춤옷을 지어 바쳤고, 이에 노턴은 매우 흡족해 하며 감사를 표하는 친서와 함께 위원 전원을 [[귀족]] 작위에 봉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mage2.findagrave.com/766_1071828629.jpg|width=100%]]}}}|| ||<:>{{{헌 옷 차림의 사진.}}} || 샌프란시스코의 최고급 식당들이 그에게 무료로 식사를 제공했고, 노턴의 허락을 받아 식당 입구에 "황실 인증 식당"이라는 금속 기념패를 설치했다. 식사 비용은 아래의 자체 발행 국채로 받았다. 심지어 샌프란시스코의 모든 극장들은 노턴의 전용 특석을 마련해두었다고 한다. 그를 위한 [[세금]]도 있었다. 상점은 주당 25~50센트, 은행은 매주 3달러로 이 세금은 당연히 강제 징수가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세금을 냈다고 한다. 아만드 바비어라는 [[경관]]이 원칙주의에 입각하여 그를 정신질환 치료를 받게 할 목적으로 체포하자, 격분한 시민들과 언론의 항의가 빗발쳤고 샌프란시스코 경찰서장이 직접 그를 풀어주고 공개 사죄했으며 시 의회에서 노턴에게 '사절단'을 보내 사죄했다. 이 사죄를 받은 노턴은 '짐은 그 일을 잊어버리기로 했다'면서 자신을 체포한 [[경관]]을 사면한다고 선언하였다. 샌프란시스코 경찰서장 패트릭 크롤리는 시의 경관들에게 길에서 노턴을 마주칠 경우 경례로 예를 갖출 것을 명령했고, 이후 샌프란시스코의 경찰들은 노턴이 지나갈 때마다 [[경례]]를 바쳤다고 한다. 노턴은 외국 통치자들과의 교류에도 관심이 있었다. [[브라질 제국]]의 황제인 [[페드루 2세(브라질)|페드루 2세]]가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하자, 샌프란시스코 시민들은 페드루 2세와 노턴 1세의 만남을 고대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노턴은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에게 자신과 결혼해줄 것을 요청하는 [[https://www.thoughtco.com/biography-of-joshua-norton-emperor-of-the-united-states-4158141|편지]]를 보내기도 하셨는데, 당연하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무엇보다 편지가 정말 도착하긴 했을지 의문은 차치하더라도, 빅토리아는 남편 [[앨버트 공]]에게 일편단심이었던데다가 이역만리 타국의 망상증 환자의 편지를 진지하게 여겼을 리가 없다. 그의 이름은 [[하와이]]에도 알려졌는데, [[하와이 왕국]]의 왕 카메하메하 5세는 편지로 몇 차례 노턴 1세와 교류했다고 하며, 재위 말년에는 미국 연방정부에 대한 신뢰를 잃고 노턴 1세만을 미국의 적법한 통치자로 여겼다고 한다.[*출처 Forbes, David. Emperor Norton & Hawaii.]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Nort10d.jpg|width=100%]]}}}|| 또 그는 자신의 빚을 갚거나 식당에서 식사하기 위하여 [[국채]]를 발행하기도 했다. 이 채권은 당대에 인기가 있었던 건 물론이고, 오늘날도 화폐 수집가들 사이에서는 구하지 못해 안달인 희귀한 아이템이라고 한다. 위 사진에 명기된 액수는 10[[미국 달러|달러]]. 일찍이 노턴은 국채를 발행하면서 "이 국채를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 큰 돈을 벌게 될 것"이라고 말했는데, 오늘날 이 국채는 화폐 수집가들에게 액면가에 이자율을 그대로 적용한 것보다 훨씬 큰 액수를 받고 팔 수 있다. 예를 들어서 50센트 국채에는 매년 7%의 이자가 붙을 것이라 명시되어있는데, 50센트 국채 중에서 상태가 가장 좋은 물품은 명시된 2012년 액면가(0.5*1.07^(132) = 약 3,800 달러)의 무려 5배인 [[https://currency.ha.com/itm/obsoletes-by-state/california/san-francisco-ca-the-imperial-government-of-norton-i-50-july-22-1875/a/3516-15754.s#auction-info|18,400달러에 팔렸다]]. 본인 말이 어느 정도 실현된 셈이다. 다만 이 국채가 진짜로 채권으로서 기능했다고 볼 수는 없다. 국채는 일반적으로 발행 국가의 신용도에 따라 그 가치가 결정되는데, 노턴은 이 금액을 상환할 능력이 없었고 보증을 서준 사람도 없었다. 그가 발행한 '국채'는 액면가와는 관계없이 노턴이 발행한 것이라는 사실만으로 가치를 얻은 것이다. 즉 노턴의 '국채'는 채권이나 유가증권이 아닌 단순한 수집품에 가깝다. --어찌됬건 큰돈을 벌게 해준 비싼 수집품이니 황제폐하께 감사하자.-- 동시대 샌프란시스코에는 자신이 [[조지 워싱턴]]이라고 주장하던 프레더릭 쿰스라는 사람이 존재했었는데, 노턴 1세처럼 유명세가 있었지만 어느날 노턴 1세와 대판 싸우고선 뉴욕으로 돌아간 일도 있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ndie69.files.wordpress.com/emperor_norton.jpg|width=100%]]}}}|| ||<:>{{{노년의 모습을 묘사한 삽화.}}} || 그리고 1880년 [[1월 8일]], 강연하러 가는 도중 길거리에서 쓰러져서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병원에 도착하기 전 사망했다. 노턴의 사망에 모든 상점들이 이 자칭 황제의 사망 소식을 듣고 문을 닫아 조의를 표했으며, 무려 1만 명의 조문객이 샌프란시스코의 거리를 가득 메웠는데, 부자부터 거지까지 신분과 빈부격차를 가리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신문사에서는 "폐하(노턴 1세)께서 [[붕어#s-3]](崩御)하시다"라는 대서특필과 함께 호외가 전 도시에 뿌려졌다. 이게 좀 대단한 게, 이때 샌프란시스코 인구는 고작 23만 명이었다. 거기에 이 양반의 장례식 때는 '''[[일식]]'''까지 일어났다. 1880년 1월 10일이 장례식이었는데, 11일에는 개기일식이 일어났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mage2.findagrave.com/766_119906277353.jpg|width=100%]]}}}|| ||<:>{{{노턴 1세. 미합중국의 황제이자 멕시코의 보호자.}}} || 노턴의 무덤. 우드론 묘지에 안장되었으며 묘비는 1934년 세워진 것이다. 그의 장례는 샌프란시스코 시 의회장으로 치러졌고, 그의 장미빛 목관은 샌프란시스코 사업가협회에서 마련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평생 아내도, 자식도 전혀 없었던 독신자였기에 후손은 없다. 다만 형제들의 후손들은 있으며, 가끔 노턴 1세 관련 행사에 참가하기도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